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찾는 곳이 법원이다. 노동자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고 만만치 않은 수임료까지 부담하면서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소송에 나선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산재 소송을 낸 노동자 10명 중 1명만이 승소 판결문을 손에 쥔다. 일하다 몸이 고장 난 당신, 자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5번 척추 6번 되게 맞아 볼래?”
최근 종영한 한 TV 드라마에서 유명세를 탄 대사다. 실제로 5번 척추가 6번이 되는 경우를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흔히 ‘디스크’라고 불리는 ‘추간판 탈출증’은 척추뼈와 척추뼈 사이에서 충격을 흡수해 주는 말랑말랑한 구조물인 추간판(디스크)이 정상 위치를 벗어나 신경을 압박해 통증을 유발하는 증상이다.
추간판 탈출증은 업무상재해(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질환 중 하나다. 산재 신청을 하는 노동자 열에 아홉은 산재인정을 받지 못한다. 질환의 발생과 경과가 노동자의 노화에 의한 것인지, 특정 사고로 인해 질환의 진행속도가 빨라진 것인지, 특정 업무가 증상을 급격하게 악화시킨 것인지 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 “나 말고도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도대체 근로복지공단은 무슨 근거로 산재 인정을 안 해 주냐고요.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자동차 노동자 장아무개(36)씨. 그는 행운아에 속한다.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그 어렵다는 산재소송에서 이겼으니 말이다. 서울행정법원(판사 조민석)은 최근 자동차 조립공정에서 일하는 주야 교대제 노동자에게 발생한 수면장애(수면·각성장애)가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서울행법 2010구단4400)을 내놓았다. 교대제 근무자의 수면장애를 업무상재해로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장씨는 이 판결의 당사자다.

자동차 공장은 대표적인 주야 맞교대 사업장이다. 노동자들은 한 주는 새벽, 그 다음 한 주는 저녁에 출근한다. 세상이 잠든 시간에도 야간근무자들은 자동차와 씨름을 한다. 잠을 자야 할 시간에 노동을 하니 생체리듬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장기간 반복된 주야 맞교대 노동은 심각한 수면장해를 유발하고, 맞교대에 따른 불규칙적인 생활은 가정파탄을 초래하기도 한다.

국내 완성차업체 중 르노삼성을 제외한 현대·기아·GM대우·쌍용 등 4개 업체가 맞교대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4개 업체 소속 정규 생산직 노동자만 어림잡아 10만명. 여기에 하청업체 인원과 완성차업체의 생산속도에 맞춰 공장을 돌리는 자동차 부품업체 종사자까지 더하면 수십만 명에 달하는 자동차업종 노동자들이 격주로 밤샘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판결은 노동시간이나 작업속도가 유사한 자동차업종 노동자들이 법원에 산재소송을 냈을 때 산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의 판단은 완전히 엇갈렸다. 공단은 “업무와 관련이 없는 개인적 소인에 의한 질병”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수면장애가 주야간 교대근무에 의해 발병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2. “노조 전임자를 가리켜 ‘근로자가 아니다’고 하는 곳은 근로복지공단뿐입니다. 근로자가 아니라서 산재 인정을 못해 준대요.”
경주에 위치한 한 자동차 부품업체 노조간부인 금아무개(37)씨. 금씨는 지난해 8월 회사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뇌동맥류 파열에 의한 뇌지주막하출혈과 뇌실내출혈 진단이 나왔다. 응급 뇌수술을 받았다. 김용규 산업의학전문의(가톨릭대 성모병원 산업의학과)는 금씨의 뇌출혈 증세에 대한 소견서에서 “단기간 및 만성적인 육체적·정신적 과로와 장시간 근무가 원인이 돼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금씨는 지난해 처음 도입된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관련 노사 교섭에 참여하던 중 변을 당했다. 타임오프 제도 시행 이후 노조의 교섭 관련 업무가 급증한 것이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 신청을 냈고, 공단은 최근 답변을 내놨다. “근로시간면제자는 산재보험법 적용대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산재 요양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씨는 공단을 상대로 법원에 행정소송을 낼 계획이다.

공단은 그동안 노조 전임자를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 왔다. 공단의 논리는 이렇다. ‘근로자는 근로의 대가로 사용자로부터 금품(임금)을 받는다’→‘회사가 노조 전임자에 지급하는 금품은 근로의 대가인 임금과 다르고, 산재보험료 산정임금에도 제외된다’→‘그러므로 전임자는 근로자가 아니다’(행정해석 징수 68607-253 등 참조).

그렇다면 법원은 어떤 입장일까. 동일한 사안을 두고 공단과 법원의 판단은 완전히 다르다. 법원의 일관된 견해는 “근로제공의무와 사용자의 임금지급의무가 면제될 뿐 사용자와의 사이에 기본적 노사관계는 유지되고 근로자로서의 신분도 그대로 가지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인 것은 명백하다”(대법원 2003.9.2 2003다4815, 4822, 4839)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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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 v s법원 '같은 사안, 다른 판단'

같은 사안인데도 공단과 법원의 판단이 엇갈리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핵심만 요약하면 공단의 산재심의 과정에 문제가 있거나, ‘전임자 근로자성 논란’의 예처럼 공단의 해석이나 입장에 대한 법리적 합리성이 떨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먼저 산재심의 과정의 문제다. 산재 판정은 다음과 같은 절차로 이뤄진다. 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공단에 산재신청을 하면, 공단 관할지사(결정기관)가 조사를 벌인 뒤 자문의사 소견을 붙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에 심의를 의뢰한다. 질판위는 20일 이내에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되는지를 심의해 그 결과를 소속기관의 장에게 통보한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질판위는 지난 2007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전면개정되면서 도입됐다. “업무상질병에 대한 판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제고한다”는 취지로 기존 공단 지사별 ‘자문의사위원회’를 대신하는 기구로 도입됐다.

그러나 늘 비리시비에 휘말렸던 자문의사위를 대신해 태어난 질판위 역시 연일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질판위 출범 이후 산재 불승인율이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질판위가 가동되기 전인 2008년 1~6월 39.2%였던 업무상질병 불승인율은 질판위 가동 뒤인 같은해 7~12월 55.3%로 껑충 뛰었다. 당장 노동계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질판위 위원 구성과 전문성 논란, 공단 자료에 의존한 형식적인 심의 과정, 정보공개를 둘러싼 폐쇄성 논란 등이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졌다.

박성훈 공인노무사(다보상법률사무소)는 “질판위의 판정이 다수결로 결정되지만, 대부분 의사위원들이 법적인 부분까지 판단하기 때문에 산재 노동자의 법적인 권리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질판위에 대한 비판이 일자 공단은 최근 전국의 6개 질판위를 서울지역 1개로 통합하고, 질판위원장 산하에 2개의 운영지원부를 두는 내용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통합 운영(안) 건의’(2010.10)를 내놓았다. 이는 외려 노동계 불만만 키웠다. 문길주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부산에 사는 허리 아픈 환자가 의견진술을 하러 서울까지 올라올 수 있겠냐”고 꼬집었다.

산재 승인기준 ‘틀렸거나, 낡았거나’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 등에 기초한 공단의 지침에 법리적 합리성이 결여돼 있을 경우 노동자들을 피곤해진다. 공단에 산재신청을 내봤자 패소할 것이 뻔하고, 곧바로 소송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단은 상당한 양의 기준과 내용을 지침으로 수립해 운영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지침이 법원의 기준을 밑도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노조 전임자의 재해 인정기준 같은 부류다.

업무상사고에 있어서도 공단과 법원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출퇴근 재해’와 ‘회식 중 음주로 인한 재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공단은 산재 인정의 핵심 요건인 ‘사업주의 지배·관리’를 좁게 해석하고 있다. 가령 회사가 제공한 차량을 타고 출퇴근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만 산재로 인정하는 식이다. 공단은 회식 중 음주로 인한 재해에 대해서도 ‘출퇴근 중의 사고’만 산재로 인정한다. 이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한 재해 요건을 넓게 보는 법원의 판례 경향과 대치되는 것이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법원이 수년에 걸쳐 지적해 온 공단 산재 인정기준의 문제점이 합리적으로 개선된다면, 노동자들이 추가 비용을 부담하며 법원으로 향하는 사례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며 “논란이 돼 온 산재 지침을 수정하는 것은 공단이 산재 노동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법원 가도 승소 확률은 10%에 그쳐

공단에서 산재 불승인 결정을 받은 노동자들의 마지막 희망은 재판에서 이겨 산재를 인정받는 것이다. 갈수록 산재 승인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소송을 택하는 노동자가 늘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공단으로부터 받은 산재소송 현황자료에 따르면 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온 산재소송 건수는 2004년 1천64건에서 2009년 1천725건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도 11월까지 1천417건의 확정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공단에서 불승인된 사안이 법원에서 산재로 인정받는 확률은 높지 않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소송 승소율이 매년 증가하는 반면, 노동자가 승소하는 사건은 10건 중 1건에 불과하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이미경 민주당 의원은 공단의 내부공문 한 장을 공개했다. 지난해 1월 공단 이사장이 경인지역본부장에게 보낸 이 공문은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2010구합1149)과 관련해 “삼성전자(주)가 보조참가인으로 동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침이 내려간 뒤 삼성전자는 국내 유명 법무법인에 소송 대리를 맡겼고, 같은해 3월 변호사 6명을 선임해 행정소송에 보조참가를 신청했다. 이 사건은 쟁송에 휘말렸을 때 공단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대기업 로펌과 공단에 맞서 이렇다 할 자료도 없이 직업성암을 증명해 내야 하는 노동자와 유가족들은 “억울하다”고 오열했다.

노동계는 노동자의 몫인 산재 입증책임을 완화하거나, 아예 입증책임을 공단이 지도록 제도를 개선하자고 주장해 왔다. ‘선 보장 후 정산’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최근 열린 한 토론회에서 노동부 관계자는 “산재보험료는 사업주가 돈을 부담하기 때문에 산재보험 제도(운영)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지난해 5월 현재 공단의 산재 불승인율은 64.5%. 노동자 100명이 공단에 산재신청을 내면 35명이 산재인정을 받은 셈이다. 나머지 65명은 소송을 내더라도 소송에서 이기는 사람은 6~7명에 불과하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구제받지 못한 58명의 산재 노동자들이 공단과 법원에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라는 말이냐.”